람빵의 고요 속 날카로운 시선

작성자 : 관리자 날짜 : 2026/09/06 13:24

람빵의 고요 속 날카로운 시선

사진작가 권학봉, 새 스튜디오에서 다음 장을 열다 PX3 2025 파인아트 부문 1위
역사와 현재를 포갠 ‘독립운동 : 겹쳐진 시선’

방콕과 치앙마이에 비하면 람빵(Lampang)의 하루는 한결 느리다. 관광객을 붙잡으려는 요란한 간판도, 유행을 좇아 하루가 다르게 모습을 바꾸는 거리도 드물다. 오래된 목조 가옥과 마차가 아직 도시 풍경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곳. 한국 교민에게는 익숙한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 고요한 북부 도시를 작업의 거점으로 삼은 한국 사진가가 있다. 다큐멘터리와 순수예술 사진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과 사회를 기록해 온 권학봉 작가다.

권 작가는 교민잡지 독자에게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다. 그동안 개인전과 그룹전, 한국과 태국 사진가들의 교류전 소식을 통해 여러 차례 그의 작업을 소개해 왔다. 그는 2017년부터 람빵에 살며 한국과 태국을 오가고 있다. 단국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기업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는 이후 사진으로 방향을 틀었다. 디자인에서 익힌 화면 구성과 조명, 후반작업의 감각은 현장의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한 장의 이미지 안에 작가의 질문을 치밀하게 배치하는 그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곳들은 대체로 관광 안내서의 바깥에 있었다. 100년 넘게 지하 석탄층이 타고 있는 인도 자리아(Jharia)의 탄광마을에서는 생존과 환경 파괴가 한데 얽힌 현실을 기록했고, 방글라데시의 로힝야 난민촌에서는 고향과 국적을 잃은 사람들의 삶과 증언을 담았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Faces of Zomia’ 작업은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남아시아 고산지대, 이른바 조미아(Zomia)의 소수민족 공동체를 오랫동안 지켜본 기록이다. 사건의 참혹함을 앞세우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과 존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권학봉 사진의 한결같은 태도다.

그의 작업은 현장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다. 2014년 인도 자리아 작업으로 온빛사진상 선정 작가 11인에 들었고, 2018년에는 로힝야 난민 기록으로 제8회 온빛상을 받았다. 이후 ‘WORSHIP’과 ‘Denial Scenery’ 같은 순수예술 연작을 통해 인간의 믿음과 욕망,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를 탐구했다.

2019년부터는 한·태 사진 교류 프로젝트 ‘PhapThaySajin’을 공동 기획하며 두 나라 사진가들이 함께 전시하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왔다. 2025년 7월에는 치앙마이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비주얼아트 석사과정을 마쳤다.

역사 위에 떠오른 한 소녀
최근 그의 이름을 다시 국제무대에 올린 작품은 ‘독립운동: 겹쳐진 시선(The Independence Movement: Layered Gazes)’이다.

이 연작은 프랑스 파리의 국제사진상 PX3(Prix de la Photographie, Paris) 2025에서 전문작가 파인아트 분야 1위에 올라 ‘Fine Art Photographer of the Year’로 선정됐으며, 세부 부문인 Fine Art/Other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 이화학당 교복 차림의 소녀가 등장한다.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특정 인물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함께 상징하는 존재다. 소녀는 탑골공원과 서대문형무소, 유관순 열사 생가, 병천오일장, 천도교 중앙대교당, 옛 태화관 터 같은 역사적 장소의 지면에서 살짝 떠오른 채 어딘가를 응시한다.

이 ‘부유’가 작품의 핵심 장치다. 인물이 땅에 발을 딛지 않은 모습은 과거가 이미 끝났다는 안도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억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익숙한 사적지는 낯선 공간으로 바뀌고, 기념비 뒤에 가려졌던 사람들의 시간이 오늘의 풍경 위로 다시 떠오른다.


람빵에 마련한 새로운 작업 거점
이 작품을 구상하고 정리한 장소가 람빵이다. 작가가 남긴 작업 노트의 끝에는 ‘2025년 5월, 람빵에서’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국제적인 수상 결과는 파리에서 발표됐지만, 그 시선을 벼린 시간은 북부 도시의 조용한 작업실에서 흘렀다.

권 작가는 근래 람빵에 새 스튜디오를 꾸리고 촬영 설비도 갖췄다. 현재 확인되는 성격은 일반 관람객을 위한 상설 갤러리라기보다 작품 제작과 인물 촬영, 소규모 조명 수업과 워크숍을 함께 진행하는 개인 작업 거점에 가깝다.

사진 조명과 포토샵·라이트룸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쓰고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온 그에게 이곳은 촬영 현장이면서 연구실이고, 후배 사진가들과 경험을 나누는 교실이기도 하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스튜디오가 한 사람의 완성된 이력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작업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권 작가는 ‘독립운동: 겹쳐진 시선’을 국내 사적지에 한정하지 않고 해외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까지 넓혀가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조미아를 10년에 걸쳐 기록했던 것처럼, 이번 연작 역시 긴 호흡의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북부의 느린 도시에서 다시 빛을 세우고 한 장의 사진을 고르는 권학봉 작가. 그의 다음 작품이 우리 앞에 어떤 질문을 가져올지, 이제 차분히 지켜볼 일이다.

글 사진 | 김종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