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맛나게 먹다

2023/07/19 16:35:34

맛나게 먹다 맛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은 어떨까요? 어떤 게 맛있는 음식일까요? 우리말은 맛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맛은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이 좋은 겁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표현이 바로 ‘맛있다’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맛은 있으면 무조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맛이 좋다’는 표현은 있지만, 맛이 나쁘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맛은 있으면 좋은 것이고, 맛이 좋지 않으면 우리는 ‘맛이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맛은 있으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것은 맛의 다양함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맛은 단맛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음식은 써도 맛있고, 짜도 맛있습니다. 물론 시어도 맛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달아도 맛이 없을 수 있고, 써도 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묘하지요. 그렇게 보면 맛은 맛을 보는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은 달라집니다. 저는 맛에 관한 우리말 감각 표현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짠맛도 아주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우선 간은 짠맛에 해당합니다. 간이 맞았다는 말도 짠맛이 적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간간하다는 말은 짜기는 한데 괜찮은 느낌입니다. ‘간이 세다’라든지, ‘간이 부족하다’는 말도 대부분 짠맛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음식의 짠맛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간장’입니다. 간장은 짠맛을 조절합니다. 또한 ‘짜다’라는 말은 다양한 변신을 합니다. 사실 짜다는 말 자체는 약간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짜다가 반복이 되면 느낌이 좋아집니다. 짭짤하다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짭조름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역시 좋은 짠맛입니다. ‘짭조름’이 변하면 ‘찝찌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달다’도 비슷합니다. 달다는 말 자체로는 부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달달하다, 달콤하다, 달짝지근하다’는 좋은 느낌을 줍니다. ‘시다’는 겹쳐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만, 모양을 바꾸어 나타납니다. 바로 ‘새콤하다’입니다. 시큼보다 새콤은 좋은 신맛의 느낌입니다. ‘새콤’은 그래서 ‘달콤’과 짝을 이루기도 합니다. ‘새콤달콤’은 맛있는 맛의 예쁜 표현으로 보입니다. ‘쓰다’의 경우에 ‘씁쓸하다’는 약간 어두운 느낌입니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나타내고자 할 때는 ‘쌉쌀하다’로 바뀝니다. ‘새콤’이나 ‘쌉쌀’은 밝은 모음으로 바꾸어 맛도 밝게 만든 겁니다. 한편 맛은 먹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이 되기도 합니다. 즉 먹는 마음 자세에 따라 맛이 음식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음식은 맛있어 집니다. 그럴 때 쓰는 표현이 바로 ‘맛나게 먹다’입니다. 맛이 나오게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음식을 아주 맛나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복스럽게 먹는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음식도 맛없게 깨작거리며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맛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가장 맛나게 먹는 방법은 좋은 사람과 먹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먹으면 음식은 맛이 더 생겨납니다. 우리말에서는 이런 관계를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먹는 입이라는 의미로 가족과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나랑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식구입니다. 식구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행복한 겁니다. 보통 사이가 안 좋은 사람에게 ‘밥맛이 떨어지다’, ‘밥맛이 없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 역으로 밥맛이 나는 사람은 좋은 관계인 겁니다. 저는 요즘 산에서 도시락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귀찮을 수는 있지만 정성이 가득이어서 좋습니다. 오늘도 산에 올라 좋은 사람과 함께,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맛이 참 좋다, 정말 맛나게 먹었다.’라고 말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삼왕(三王) 이야기

2023/07/01 11:22:39

삼왕(三王) 이야기 ‘왕이 세 명 있었다’라고 하면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왕은 여자인 왕입니다. 제가 굳이 여왕이라는 표현을 피하는 것이 여왕이 특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신라 시대에는 세 명의 여자인 왕이 있었습니다.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이 그들입니다. 세 왕의 칭호에는 원래 여왕이라는 말은 붙지 않습니다. 그냥 왕이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굳이 구별을 지으려고 여왕이라고 했던 것뿐입니다. 신라 시대에 여자인 왕이 셋이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혹시 한 명이었다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셋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덕왕과 진덕왕, 진성왕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요? 여자이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이 편견을 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을 성별에 따라 구별하였다면, 남왕, 여왕이라고 하였어야 하지만 굳이 여왕만 ‘여’를 붙여 구별하는 것은 사회를 반영합니다. 이런 것을 언어학에서는 유표라고 합니다. 아직도 이런 현상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여교수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선덕왕은 신라의 제27대 왕입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왕입니다. 선덕왕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만,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분황사를 짓는 등 신라의 대표적인 건축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다음 왕인 진덕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봐서 여자인 왕의 평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당태종이 선덕왕을 여자라고 하여, 사신에게 폐위하기를 이야기하나 결과적으로는 다음 왕 역시 여자가 왕이 되는 겁니다. 여자인 선덕왕이 문제가 있었다면 또 여자에게 왕위를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진덕왕은 삼국사기에 보면 키가 7척으로 나옵니다. 그야말로 당찬 왕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지만 김유신 등을 시켜서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무엇보다도 진덕왕은 신라의 왕 중에서 성골의 마지막 왕입니다. 다음 왕은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으로 이때부터는 진골이 왕이 됩니다. 진덕왕 시절에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활약하던 시기는 선덕왕과 진덕왕 시절인 겁니다. 세 번째 여왕인 진성왕도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진성왕은 역사책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각간 위홍과 염문이 있었고, 젊은 관료와도 염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여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자였기 때문에 왕이었음에도 차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진성왕 시절에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이 만들어졌음은 주목할 만합니다. 다만 삼대목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입니다. 국어사, 국문학사가 완전히 달라질 책입니다. 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진성왕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여전히 삼대목을 찾으러 다닙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 왕은 모두 여자였습니다. 어쩌면 세 왕이 신라에서 나온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박혁거세와 함께 성인으로 불렸습니다. 원화는 선덕왕이 등극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신라의 여성 리더 조직입니다. 저는 신라에서 여자인 왕이 나온 곳은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름에 여왕을 붙여 부르는 것은 폄하하는 태도라고 봅니다.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으로 원래 이름을 불러야 할 겁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웅녀와 유화, 알영 그리고 허황옥

2023/05/22 11:59:19

웅녀와 유화, 알영 그리고 허황옥 역사를 읽는 방법은 다양할 것입니다. 어떤 것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며, 어떤 내용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특히 신화, 설화로 포장되어 있는 역사에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를 읽고, 공부하면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을 봅니다. 나라를 세우는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통은 하늘에서 온 사람이 땅이나 물의 사람을 만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역사를 보면 주로 이동해 오는 민족은 자신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아들이니, 하늘에서 왔다느니 하는 말은 주로 내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태양이라고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한편 자신을 땅의 신이라든지, 물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그곳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땅이나 물이 옮겨 다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하늘이라든가 해는 주로 낮을 의미하고, 낮은 주로 남성으로 상징됩니다. 해가 꼭 남성일 필요는 없으나 신화 속에서는 해는 주로 남성입니다. 달이나 밤이 여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구별이 적은 원시공산사회가 모계사회이고 그래서 밤으로 상징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한편 부계사회는 주로 사유재산의 형성과 관련이 됩니다. 당연히 신분제 등과도 관련을 맺습니다. 구별과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상징은 태양이 됩니다. 밝은 사회이지만 구별이 있는 사회입니다. 개인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밤은 여성을, 낮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밤낮이라는 표현은 흥미롭습니다. 밤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언어는 대부분 낮이 앞에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이 구조에 들어맞습니다. 고조선을 세우는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죠. 남자입니다. 하늘의 아들과 결혼하는 여자는 땅에 살고 있던 곰이 변하였습니다. 어둠을 상징하는 굴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나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탄생도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물을 상징하는 하백의 딸이 만납니다. 물론 해모수는 남자이고 하백의 딸 유화 부인은 여자입니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와서 흥미롭습니다. 여기에서도 곰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곰은 토템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백제에도 웅진(熊津)이 나옵니다. 박혁거세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납니다. 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이 기원입니다. 당연히 혁거세도 남자입니다. 부인인 알영은 용의 딸입니다.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용은 주로 물의 상징입니다. 바다의 주인은 용입니다. 그래서 용왕은 주로 바다에 있습니다. 가야의 수로왕도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납니다. 하늘과 알의 상징이 모두 쓰였습니다. 수로왕의 부인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옵니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으로 나옵니다. 물의 상징과 여성의 상징이 쓰입니다. 다만 진짜로 아유타국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상징으로 보면 바다는 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물과 여성의 상징이니 토착민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주민으로 보아야 할지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건국신화의 시작은 하늘에서 내려온 남성과 땅, 물에 있는 여성의 만남입니다. 우리 신화의 특징은 조화입니다.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싸움이 없는 홍익인간(弘益人間),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펼치게 됩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말의 두 모습

2023/04/25 11:25:47

말의 두 모습 말은 늘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아니 귀 옆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다양한 말이 허공을 떠돌기도 하고, 나의 선택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언어가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세밀한 차이 때문이고, 잠깐 달리 생각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품격이 있는 말이라고도 하고, 저렴하다고 하고, 속되다고도 하고, 뻐긴다고도 합니다. 말은 의사소통에서 양면, 다면을 갖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즐거운 상상의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너무’라는 말은 부정과 호응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너무’를 긍정적인 표현과 함께 쓰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너무 완고한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는넘다와 관련이 있어서 넘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기에 이런 규칙 아닌 규칙이 생겨났을 겁니다. 하지만 넘치는 감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맛있다’에서 저는 어색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너무를 매우로 바꾸면 더 어색할 것 같습니다. 너무와 매우, 아주 등을 보면서 그 차이가 감정의 차이가 됨을 느낍니다. 강렬한 표현은 강렬한 감정을 보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이 좋다는 표현을 할 때 ‘와, 미쳤다!’라고 합니다. 강렬하지요. 물론 전에도 ‘죽인다’라는 표현이 아주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죽인다는 표현 못지않게 죽겠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사실은 무서운 말이지만 삶 속에서는 ‘죽다’만큼 센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가고 싶어 죽겠다, 보고 싶어 죽겠다처럼 죽으면 할 수 없는 일에도 사용을 합니다. 살고 싶어 죽겠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요. 친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친구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의외로 친구는 비하의 장면에 주로 쓰입니다. 이 친구, 저 친구라는 말에서 종종 기분이 나빠집니다. 친구는 친구에게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의 다른 말인 동무라는 말을 아무 데나 써서 진짜 동무가 사라진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과 지역이라는 약간 다른 단어로 썼을 뿐인데, 차별적인 느낌이 듭니다. 사실 표준어와 비표준어라는 말도 차별어인 셈입니다. 사투리나 방언은 지방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서울사투리, 서울 방언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자꾸 서울과 기타 지역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지방대학과 지역대학은 완전히 다른 느낌입니다. 지방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지방을 지역이라고 부르는 일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아범과 아비, 아버지와 아버님도 다 다른 말입니다. 정확히 구별하여 쓰고자 하면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쓰는 사람도 적고, 그것마저도 어떤 것을 정확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참 빠릅니다. 요즘에는 아범과 아비, 애비는 잘 쓰지 않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말과 쉬운 말이 앞에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쉬운 말을 쓰기 바랍니다. 말의 목적은 소통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어려운 말을 쓰기 원하는 경우라면 할 수 없이 어려운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쉬운 표현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유감입니다’보다는 ‘미안합니다’가 훨씬 좋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표현을 할 때는 조금 더 명료하게 하는 게 좋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보다는 ‘미안합니다’가 낫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내 앞에서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즐거운 고민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더 살맛 나게 해주세요. 내가 사용하는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이 됩니다. 언어가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글의 마무리와 수정

2023/02/28 11:04:46

글의 마무리와 수정 글을 마무리한 후 자신의 글을 공적(公的)으로 내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글을 활자화하기까지는 최대한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생각보다 수정할 부분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교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글의 수정 방법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너는 우선 제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어 봅니다. 이때 눈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것을 권합니다. 특히 저처럼 구어체, 혹은 준 구어체로 말하듯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의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금방 발견이 됩니다. 내용도 발견이 되지만 발음이나 문장의 길이, 호흡 등도 눈에 뜨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쓴 글이 그대로 강의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 할 때 필요한 글이기 때문에 구두로 읽어 보는 과정은 글의 음운적인 측면을 보강해 줍니다. 그리고 읽어 보면 의외로 틀린 부분도 잘 보입니다. 시각과 청각이 합쳐져서 감각을 깨우는 듯합니다. 감각은 합쳐질 때 위력을 발휘합니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 쓰고, 읽고, 듣고, 말하는 기능을 한꺼번에 하면 훨씬 효율이 오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촉각을 더하기도 합니다. 저는 제 글을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는 편입니다. 활자화되면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글이니 미리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다른 이의 의견을 듣고 고치는 것이 출판된 후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보여주는 사람의 의견은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견을 거부할 거라면 보여주는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고 그 사람의 의견에 기분 나빠할 거라면 보여주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다른 사람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인다는 자세여야 하는 겁니다. 저의 경우는 아내나 아들, 제자, 벗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제 글의 주제에 관심이 있어 할 사람을 선별하여 보여줍니다. 제가 글을 보내주면 맞춤법에 틀린 부분이나 문장의 오류를 지적하여 조심스레 다시 보내오기도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본인이 생각하는 글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하였거나 일부러 뺀 부분이 덧붙어 오기도 합니다. 다시 글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됩니다. 수정할 게 많아져서 기쁘기도 합니다. 제 글 중에서 좋은 부분을 이야기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시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부분을 발견하려면 다른 부분도 읽어야 하기에 저를 이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과 의견이 일치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뜻밖의 문장을 좋아하는 경우는 제 글을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차피 글은 독자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즐겁게 오가는 글을 읽습니다. 최종적으로 글을 내보이게 될 때는 가능하면 전문가의 교정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출판사나 신문사의 교정, 편집 관계자도 좋고, 어문교정 전문가도 좋습니다. 저는 편집자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또한 어문교정의 경우는 제가 놓친 실수를 잡아주어서 고맙습니다. 물론 수정 작업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이나 표현이 흔들리는 수준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글의 마무리와 수정을 내 글을 정돈하고 돋보이게 하는 과정이지 내 글을 다시 쓰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글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면 이미 내 글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글을 잘 마무리하여 완성된 글로 세상에 보이는 것은 두렵지만 기쁜 일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조현용의 우리말로 깨닫다] 증 이야기

2023/02/14 14:49:40

증 이야기 ‘증(症)’이라는 말이 붙으면 병과 관련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확하게는 병이라기보다는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 등을 나타냅니다.(표준국어대사전) 그러니까 병이 아니어도 증이 붙을 수도 있고, 병의 증세니까 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어지럼증도 그런 단어일 겁니다. 우울증이나 어지럼증은 여러 병의 증세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도 병인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은 매우 심각한 병일 수도 있는 증세입니다. 한편 ‘의처증(疑妻症)’이나 ‘의부증(疑夫症)’ 같은 요사스런 증세도 있습니다. 이상하고 위험한 증세입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화증(火症)’도 생각해 보면 병입니다. 그래서 ‘화병(火炳)’이라고도 했을 겁니다. 화병은 한자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몸과 마음속에서 불이 나는 겁니다. 비슷한 증세로는 짜증도 있습니다. 짜증은 늘 일어나는 증세는 아니지만 짜증이 일어나는 순간 어느 병보다도 전염성이 강합니다. 무서운 병이지요. 저는 짜증의 어원을 ‘짜다’에서 온 걸로 봅니다. 자신을 쥐어짜는 병이고, 마음속에 남의 자리를 없애는 병입니다. 짜증은 얼굴에도 나타납니다. 얼굴을 쥐어짜면 인상을 쓰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짜증은 치유가 가능합니다. 얼굴을 그저 펴면 됩니다. 짜증이 날 때마다 살짝 웃어보는 것은 치료의 명약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웃음 띤 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도 얼굴이 펴집니다. 전염이 사라지는 겁니다. 짜증처럼 용언의 어간에 증이 붙는 구성의 어휘로는 ‘싫증’이 있습니다. 싫증은 사전에서 ‘싫은 생각이나 느낌 또는 그런 반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염증(厭症)’이라는 한자어의 고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염증의 염은 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싫증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왠지 부족한 느낌입니다. 싫증은 처음부터 싫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래 갖고 있어서, 자주 보아서 생긴 감정입니다. 신물이 난다고도 하고 식상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싫증 역시 치유가 가능한 병입니다. 잠깐 거리를 두거나 새로움을 찾으려 노력을 하다 보면 싫증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싫증이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재탄생합니다. 익숙함과 편안함은 싫증의 다른 모습입니다. 짜증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귀했던 것인데 귀함을 잊어버리면 짜증이 나는 겁니다. 그럴 때 쓰는 말이 ‘귀찮다’입니다. 귀찮다는 ‘귀하지 않다’가 줄어든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이 와도 귀찮아서 밀어내게 됩니다. 말에도 가시가 돋습니다. 싫증과 짜증은 하루라도 빨리 치유해야 하는 증세입니다. 수많은 증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이 되는 증도 있습니다. 바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이라고 이름 붙인 ‘궁금증’입니다. 이런 병이라면 앓아도 될 듯합니다. 인류의 발전은 궁금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자어로는 호기심이라고 하죠. 호기심은 기이하고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나와 다른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눈이 반짝입니다. 궁금증은 아는 게 많을수록 커지는 병입니다. 병이 자라납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배움의 깊이와 넓이도 달라집니다. 증세가 자라나서 기쁜 병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늘의 ‘증 이야기’ 역시 궁금증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한참 동안 증과 병의 차이점을 생각하다가 생각이 꼬리를 문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 한국어교육 전공) iiejhy@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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